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(문단 편집) ===# 전투 규모 추정 (일본) #=== * 1591년, [[임진왜란]]에 시마즈 군은 15,000명을 동원했다.[* 미키 야스시(Miki Yasushi) [[가고시마대학]] 교수 [[https://m.blog.naver.com/halmi/50180569791|#]]] 시마즈 군은 출병 이래 이렇다 할 손실은 없었다. 임진년(1592년) 태풍으로 격군-선원을 일부 잃었으나 미미한 수로 정유재란 시 복구되었다. * 1596년, 시마즈의 보고 기록에 따르면 가신인 이쥬인의 병력까지 15,000명을 정유년(1598년)에 재도입할 계획을 밝혔다.[*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따르면 피로인(끌려간 조선인)중 끌려가 군사훈련을 받은 자만 해도 3~4만에 달한다고 한다.][* 2005년 후지키 히사시가 쓴 <천하통일과 조선침략>에 따르면 1596년 시마즈 스스로가 동원하는 병사는 12433명이고 가신인 이쥬인 타다무네가 동원할 병사는 233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. 그외 기마 사무라이 240인까지 더해 15337명이다.][* 이쥬인 타다무네는 노량해전이 끝난지 얼마 안지나 시마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] * 1597년 7월, [[칠천량 해전]]에서 김응남이 일본의 [[세키부네]]가 임진년에 비해 커졌다고 보고했다. [[https://sillok.history.go.kr/id/kna_13007022_003|#]] 약 80인승에서 100인승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. * 1598년 10월, [[사천성 전투]]에서 시마즈 군은 7,000~8,000명이었다. 선조실록 1598년 9월 28일 추정으로, 같은 기록에 '어떤 이는 1만여 명이라고도 한다'는 것을 병기했다. 상식적으로 성밖에서 성안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. / 또한 시마즈 군은 사천성 전투의 성과를 부풀린 전적이 있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. * 1598년 12월, 노량 해전 참전 무장별 군역장에 따른 병력 추정은 다음과 같다.[* 1990년대 나온 참모본부의 일본전사 조선역을 이유로 일본군 전체 병력이 7~8천에 불과하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. 하지만 기록된 군역장보다는, 함선 수에 탑승인원을 곱해 추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 자명하다. 일례로 [[명량 해전]]의 일본군 군역장은 와키자카+도도+구루시마 7천명에 불과하지만, 세키부네 130척 안택선+고바야부네 170척이상의 탑승인원을 추정하면 이를 크게 상회한다.] * (사천왜성) [[시마즈 요시히로]] 13,000~15,000명 - 일본인 7~8천에, 조선인 격군/선원 7~8천.[* 난중잡록이 "조선인 남녀 포로가 많았다"는 점과, 명나라 이천상의 조선인 포로 수백명 구출 기록이 교차검증된다.] * (고성왜성) [[타치바나 무네시게]] 5,000명, [[타치바나 나오츠구]](타카하시 무네마스) 500명, 모리 히데카데, 쓰쿠시 히로카도 500명 * (남해왜성) [[소 요시토시]] 800~1,000명 - 선조실록 1598년 9월 23일 추정. 남해왜성을 쌓는데도 조선인이 많이 동원되었다. * (부산왜성) [[테라자와 히로타카]] 1,000명 * 1600년 10월, 사쓰마(시마즈)의 [[세키가하라 전투]] 참여규모를 통한 추정 * 시마즈가는 많아야 1600명을 동원했다.[*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직후로 내부 사정이 어려웠기에 시마즈 가는 그 규모와 히데요시의 요구에 비해 동원한 병력이 적었고, 이마저도 힘들게 마련했다. 그게 피해를 입은 것이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현실이다. '''상식적으로 동원할 병력이 있어야 동원 운운할 게 아닌가?'''][* 일본의 소설가 시바 료타료는 이유를 시마즈식의 동원 체계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그 외에 요시히사와의 갈등으로 요시히로가 직접 모은 병력만 이끌고 갔다는 것, 내부 사정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 등이 있다.] * 이후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가 시마즈를 토벌하겠다 하자 가신들이 '시마즈는 1만이 있다' 말렸지만,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.[* [[미카타가하라 전투]] 직후 [[코사카 마사노부]]가 이에야스에게 '시간을 끌면 노부나가가 8만을 이끌고 올 것' 간언했지만 실제 [[나가시노 전투]]에 온 것은 3만이었다. 즉 간언도 추정치인 것.][* 보통 석고 1만 석당 250명으로 계산하는데, 시마즈 가는 70만 석으로, 17,000명 동원이 최대다. 그리고 조선처럼 바다건너 공세가 아닌, 방어전에 1만을 동원하긴 어렵다.] * 1609년 3월, 사쓰마(시마즈)의 [[류큐 왕국]] 침공규모를 통한 추정 * 시마즈는 3천명을 동원했다. 이를 두고 '이에야스 막부의 기습침공 방어를 위해 3천은 남겨야 했을 테니 전체 규모는 6천이었을 것'이라는 주장이 있으나, 이 때는 막부가 시마즈에게 류큐 복속을 명령한 때라 오히려 가진 걸 쥐어짜 신속히 류큐를 먹는 것이 최선이었다. 따라서 이 3천만으로 시마즈 가의 군 규모를 알긴 어렵다. 또한 임진년/정유년에 잡병/포로 고용이 빈번했으며, 그간 성인이 되었을 장정도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